부산 서면, 도시의 둘레를 걷다

페인터 허찬미의 작업실

건물 6층, 쉽지 않은 높이에 위치한 허찬미 작가의 작업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숨을 돌리고 둘러본 부산 도시의 풍경은 아파트와 고층 건물, 크레인이 자리한 모양까지 서울이나 기타 도시들과 비슷하다. 복잡한 풍경을 뒤로 하고 바라본 작업실과 작업들은 놀랍도록 평온하고 환하다. "도시 사는 여러분, 오늘도 수고 많아요." 정답게 말 한마디 건네는 듯한 느낌은 해사시한 작가의 표정 때문일까, 눈길을 끄는 작업 때문일까.
허찬미 작가
작가님 작업실에서 부산 서면이 넓게 보이네요. 저녁이 되면 더 예쁘게 보일 것 같아요. 부산에서 태어나서 계속 거주하였지요?
부산에서 태어나 현재도 부산에 살고 있어요.

부산이라는 도시가 작가님에게 주는 영향이 있을까요?
부산은 산을 깎아 집을 지은 곳이 많아요. 한국 전쟁 당시 남쪽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살 곳이 부족하다 보니 산 위로 올라가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높은 산 위로 지어진 아파트와 주택이 많아요. 그리고 일부 지역은 물길을 따라 집을 짓고 살기도 했습니다.
저는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이동하는 동안 바깥 풍경을 보다 보면 부산의 길과 산은 참 복잡하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런 빽빽한 밀도들을 관찰하곤 합니다.

많은 작가님들이 옥탑, 즉 건물 옥상에 있는 간이주거시설을 이용하여 작업실로 많이 이용하는데요. 작가님 작업실은 정말 작업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자연스럽고 뉴트럴한 공간처럼 보이는 점과 낯설게 느껴지는 서면 한 가운데의 풍광이 인상적입니다.
서면은 부산의 번화가 중 한 곳이에요. 그래서 다양한 연령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이 곳을 다닙니다. 그런 사람들의 에너지 근처에 머무르며 작업한다는 게 처음엔 꽤 낯설고 신기했어요.
 
작업실 옥상에서 바라본 부산 서면의 풍경
항구와 나무, 2022, 캔버스에 아크릴 과슈, 130.5 x 89.5 cm, 2022 (c) 허찬미
위로 움직이는 그림자, 2022, 캔버스에 아크릴 과슈, 60.8 x 45.5 cm, 2022 (c)허찬미
작가님 작업실에 개인 물건이나 취향을 타는 물건이 많지 않네요. :-) 필요한 것만 있는 것 같아요.
작업을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물감이 많이 묻어요. 옷은 두말할 것 없고 각종 소지품에도 물감이 자주 튀어서, 작업에 필요한 것 외의 소품 등은 잘 두지 않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꿈이 화가였다고 들었어요. 계기나 이유가 있을까요? 예술가들은 자신이 예술가가 될 것을 언제부터 인지하였을까 항상 궁금했거든요.
어릴 적 저는 무척 소심했고 가족 이외의 누군가와 교류하는 것이 어려웠어요. 대인관계에 서툴러서 의사를 전달하거나 표현하거나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았어요. 대신 그림은 말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습니다. 보여주면 되니까요. 그리고 밥 아저씨를 보면서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시 장면, 개인전 <파생된 중독>, 2016, 스페이스 만덕, 부산, 이미지 제공 허찬미
첫 개인전에 대해 얘기를 나눠볼까요? 전시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전시장면을 보니 설치 작업이 주를 이루던데, 학교에서 설치작업을 주로 하였나요?
제 첫 전공은 일어일문이었어요. 미술과 무관한 전공을 하다가 3학년이 되었고 동기들은 다들 바쁘게 미래를 준비하는데 저만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이었어요. 의욕도 없었고 꿈은 있지만 실행할 용기도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더는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 휴학을 하고, 미술학과로 편입을 했어요. 2년 동안 서양화 전공을 했고, 입체 전공으로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당시엔 실제로 만질 수 있는 사물이 직접 전시장에 개입된다는 것이 흥미로웠거든요. 평면은 드로잉 위주로 진행했고, 설치 작업에 집중하기도 했습니다.


작가님이 직접 쓴 첫 개인전의 서문이 무척 흥미로웠어요. 특히 이 부분, ‘땅 속에는 빛이 없기 때문에 흙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가 되고 물은 성장과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하고 이 환경에 자리한 식물은 매일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식물에게 필요한 빛, 흙, 물과 같은 조건이 어쩌면 어떻게든 살아가게 만드는 강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아요. 제가 느낀 부분이 언급해주신 부분과 동일해요. 당시 여러 방면으로 식물에 노출된 기회가 많았어요. 자라는 식물을 보며 스스로를 식물에 이입해보기도 했어요.
회화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나요? 2017년 <지속의 민낯> 개인전에서 지금과 같은 회화의 모습이 드러나고, 식물 붓이라는 이름의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대학원 실기실 건물 바로 앞에 공사장이 있었어요. 규모가 큰 한식당이었는데, 그 자리에 빌딩을 세우더라구요. 한식당 앞으로 장독과 화분들이 있었는데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어요. 중장비와 자재들이 들어오면 허물어지고 밟힐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고, 급한대로 삽이랑 일회용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나가서 거기 있는 식물들을 담아왔어요.
한동안 식물을 예술대학교 화장실 창가에 두고 청소하시는 분들과 함께 키우기도 했구요. 졸업 후에 식물을 집으로 데려와 아빠랑 같이 돌보았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죽어가는 것들, 마른 것들이 생겼어요. 그들의 이파리를 모아 붓을 만들고 바깥의 풍경을 그린 것이 식물 붓을 사용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가님은 산책을 기반으로 하여, 주변을 관찰하고 새로운 시선을 댄 작업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많이 걸으시나요?
저에게 걷는 행위는 일상이에요. 집 앞이 바다이고 근처에 골목이 많아요. 바다를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골목을 걸으면서 마주치는 장면들이 작품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늘과 바다와 모래와 사람, 2022, 캔버스에 아크릴 과슈, 130.5 x 97 cm, 2022 (c)허찬미
이번 개인전 작품 중에 <하늘과 바다와 모래와 사람>이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전체 푸른 화면에서 사람은 매우 작고 간략하게 그려졌지만, 충분히 열심이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그 모습이 화면 전체를 좌우할 만큼 에너제틱하게 느껴졌어요.
<하늘과 바다와 모래와 사람>은 바닷물에 촉촉하게 젖은 모래 위를 걷는 사람을 그린 작품이에요. 최근에 물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보고, 사진으로 남기고 있어요. 자전거 타는 걸 꽤 좋아하는데, 광안리 방파제에서 시작해 수영강 근처로 아빠와 자전거를 자주 타기도 했어요.
한편 미디어에서 사람을 가르는 행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시선을 가르는 행위들이 물 근처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보이기도 해요. 물 근처에 모인 사람들은 걷거나 서있거나 뛰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앉거나 쉬거나 기대거나 그러거든요. 무언가를 가르기보다, 쭉 뻗은 물길을 따라 제각각 움직이는 다양한 모양들이 인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작품 제목들도 재밌어요. 위 작품도 그렇지만, 벽, 아파트, 나무, 고양이, 풀, 항구, 차도 등 모두 일상에서 걷는 동안 보이는 사물들을 나열한 제목입니다. 이렇게 정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부산에 두 번 연달아 태풍이 온 적이 있어요. 굳게 뿌리 박혀 있던 것들이 찢어지고 뽑히고 날아갔어요. 한 순간에 커다랗고 단단한 것이 지워지고 부숴졌어요. 뾰족한 나무의 결을 뭉툭하게 다듬는 톱 소리를 들으면서 주변의 시끄럽고 복잡하고 웅장한 것들을 음 소거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어에 해당하는 사물의 본래 물성에 집중해서 나열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태풍이 온 다음 날 흩어진 것들을 종류별로, 낙엽은 낙엽 대로, 나뭇가지는 나뭇가지 대로, 쓰레기는 쓰레기 대로 모았어요.
제목도 마찬가지에요. 집은 벽이 되고 땅이 되기도 하고, 길고양이가 사는 곳은 그런 벽과 땅과 또 땅에서 자라는 화단이 되고, 항구에 사는 비둘기와, 바다 위에 떠있는 커다란 배들, 바다의 모래와 바다를 둘러싼 나무들과 물 그런 것들을 나열해 보았어요.


<작은 다윗>이라는 제목의 작은 드로잉도 인상적입니다. 2018년 조은정 학예사가 부산시립미술관 단체전 서문을 통해 작품 제목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 있어요. ‘(집에서 교회까지 걷는 행위의) 1,819걸음이 닿는 지점을 인식하게 하고 그곳에 있는 잡초에 시선을 두게 하였으며 잡초가 자라는 환경과 그 주변을 바라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의 걸음이 닿은 곳에 있는 잡초의 감추어진 강인하고 필사적인 생명력은 작가에게 ‘골리앗에게 대적하는 작은 다윗’으로 인지하게 하였다.’ 작가님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사색성, 추상성과 더불어 종교적인 구도를 인지하게 하는 부분이에요.
저는 모태신앙이라 종교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 묻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어요. <작은 다윗>은 그런 생각들이 반영된 작업이었습니다.
 
작품 부분, 아파트 돌 고양이, 2022, 부산, 캔버스에 아크릴 과슈, 162.2 x 112.1 cm, 2022 (c)허찬미
풍경과 정물 기반의 회화가 대부분인데요. 작업의 과정을 좀더 설명해 주시겠어요? 사진을 찍어서 이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진의 구도와 포커스가 화면의 구도와 포커스에 많이 반영되는지 궁금합니다.
카메라가 없는 일상은 상상하기 어려운 요즘이에요. 스마트폰 카메라도 무척 발달했고요. 스마트폰 사진 감성이라는 것도 생겨났으니까요.
무언가를 포착하고 아카이브 하는 것은 축적과 소유에 대한 본능이라고 생각해요. 제 주변 풍경을 사진으로 차곡차곡 모아두는 것은, 한 순간에 무너지거나 사라질지도 모를 풍경들을 보면서 느끼는 허탈감을 위로하는 방법이기도 해요. 그래서 아주 멀리 있는 장면이라도 찍고 싶은 장면은 최대한 줌을 당겨 작더라도 남겨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작품 화면의 커다란 배경은 생략된 채 묘사되지만 배경 속에 있는 작은 개체들은 작지만 역동적으로 표현되기도 해요. 반면 오래 멈춰 있는 대상들은 화면에 큼직하게 들어가기도 합니다.


관람자들은 작가님의 자유로운 스트로크의 에너지, 점, 선, 면의 섞임, 추상같다 가도 구상이 우연히 드러나는 이미지, 안정적이면서도 튀는 색의 겹침과 섞임 등의 요소를 특히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모두 지극히 전통적인 회화의 요소들인데요. 최근 태블릿을 이용한 디지털 그리기도 하고 있어서 궁금해집니다. 아날로그, 디지털 두 매체를 사용해보니 어떤가요?
그림을 대할 때 ‘눈으로 만진다.’는 경험을 주는 작품을 좋아합니다. 그림 표면의 두께가 전달하는 느낌이요. 무작정 두꺼워야 좋은 것이 아니구요. 회화가 주는 두께감과 디지털 페인팅이 주는 납작한 두께감은 서로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평면 회화의 경우 배경 채색과 단계별 채색, 그리고 선이 쌓여 하나의 결정적인 것을 만들어낸다면, 디지털로 작업할 때는 많은 단계를 생략할 수 있어요. 오로지 선으로 끝내는 것에 무리가 없기도 해요.
대신 스크린의 크기가 한정적이라 캔버스 앞에서의 몸동작과 많이 달라 낯설기도 했습니다. 서서 몸을 움직여 그리는 방식과 앉아서 손가락으로 확대하고 축소하며 스마트 펜슬 하나로 재료를 바꾸는 등 두께의 차이와 액션의 스케일에서 차이를 느끼고 있어요.
올해 하반기는 덴마크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하러 가시지요? 그 곳에서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을까요? 작가님 작업에선 장소성이 매우 중요해 보여서 낯선 지역을 마주할 때에 작가님의 특별한 계획이 있을까요?
덴마크 에펠토프트(Ebeltoft)로 하반기에 레지던시를 다녀옵니다. 저는 부산에서 나고 자라 부산 밖을 여행 외에는 벗어나본 적이 없어요. 여행과 체류하며 작업하는 것은 많이 다를 것 같아요. 레지던시를 준비하면서 시간을 들여 지역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덴마크는 한국과는 속도가 매우 다른 곳으로 알고 있어요. 아마도 한국보다 더 느릴 것이라 짐작해요. 그런 것들을 눈 여겨 보고 싶어요. 작은 항구가 있어서 일대를 관찰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2017년 이래로 작업한지 6년째가 되네요. 작업을 해보니 어떠신가요? 미래에 대한 궁금함과 불안이 섞여 있을 것 같아요.
작년엔 불안함이 더욱 컸던 것 같아요. 대학원 재학 중 스스로 모든 과정을 준비해서 개인전을 개최했어요. 당시는 부족함이 정말 많았고 스스로 미숙했다는 생각에 위축되곤 했어요. 2021년 개인전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전시를 잘 만들어갈 수 있었어요. 지지와 응원에 힘을 얻고 나니 미래에 하게 될 작업에 더욱 기대가 됩니다. 하지만 늘 변수는 존재하고 한 순간에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으니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말자고 다짐하지요.


이번 7월 이모먼트 팝업 개인전 관련하여,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작품을 보면 도움이 될지 관람자들을 위한 팁이 있다면 알려주시겠어요.
나열된 단어들이 가지는 불규칙한 선과 덩어리에 집중해서 보면 어떨까요? 내리는 장맛비도 불규칙하고, 내리쬐는 것들이 많은 여름이지만 그래도 삐죽삐죽 솟아 있는 것들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LIUSHEN
LIUSHEN
허찬미
회화, 설치
1991년 부산 출생인 작가 허찬미는 2016년에 첫 개인전을 가진 신진작가이다. 허찬미는 작가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는 요즘의 추세에 비하여도 매우 젊은 작가이지만, 작업을 시작한 이래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약 스무 개에 달하는 개인전과 단체전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2018년 부산시립미술관의 젊은 작가 단체전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에 선정된 후 2020년 부산비엔날레, 2022년 아트선재센터 덴마크 예술기관 교류전, 부산현대미술관 주제전을 통해 국내외 기획자들과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비평계의 관심 뿐만 아니라, 2021년 12월 대구 우손갤러리 최연소 작가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미술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로 성장하고 있다.
2022 개인전, 물꽂이, 아트앤초이스, 서울 (기획 이모먼트 바이 리우션, 에이앤씨유니온)
2022 단체전, 거의 정보가 없는 전시, 부산현대미술관, 부산
2022 단체전, 미니멀리즘-맥시멀리즘-메커니즈즈즘 1막­2막, 아트선재센터, 서울
2021 개인전, Settlement, 우손갤러리, 대구
2021 단체전, BMA 소장품보고 COLLECTION REPORT,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20 단체전, 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스페이스 닻, 부산
2019 개인전, 3 1 0 4, 스페이스 클립, 부산
2019 개인전, 말린 종이를 펴는 방법, 가창창작스튜디오, 대구
2019 단체전, 뉴드로잉 프로젝트, 양주시립 장욱진 미술관, 양주
2018 개인전, 작은 다윗, 홍티아트센터, 부산
2018 단체전, 젊은 시각 새로운 시선, 부산시립미술관, 부산
2017 단체전, 무적자들, 오픈스페이스 배, 부산
2016 개인전, 파생된 중독, 스페이스 만덕,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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