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을 입은 서양동화

일러스트레이터 우나영(흑요석)의 작업실

족자와 고가구로 둘러싸인 좁은 공간에 댕기를 맨 앨리스와 갓을 쓴 토끼를 뒤로 하고 들어서면, 이내 저고리를 걸친 마녀와 씨름판을 벌인 토르, 기와 지붕 끝에 앉은 스파이더맨과 눈이 마주친다. 동양도 서양도, 과거도 현재도 아닌 희한한 그림으로 가득찬 곳, 이 곳은 어디일까?
안녕하세요. 흑요석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복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우나영입니다. 
저를 ‘한복을 입은 서양 동화’ 시리즈를 통해 알고 계신 것 같고요. 그 외에 디즈니, 마블에서 제작한 <토르: 라그나로크>, <말레피센트>, <크루엘라>, <이터널스> 영화들의 한복 버전 포스터 작품들을 통해 저를 많이 알아봐 주시는 것 같습니다.
작업실이 아늑하네요. 작가님의 하루 일과가 궁금합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들 아침을 차리고,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서야 작업실에 옵니다. 밥 먹을 때, 화장실 갈 때 빼고 계속 앉아서 일만 하는 것 같아요. 일이 끝나고 나서 저녁에 아이들을 어머님, 아버님 댁에서 데려와, 놀아주고 간식도 먹입니다. 마침내 같이 자려고 누우면 머리가 닿자마자 잠이 들게 되더라구요.
한복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게임 회사를 한 10년 정도 다니다가, 저만의 그림을 다시 그려야겠다 생각했어요. 오랫동안 작업을 하다보니, ‘나는 처음에 그림을 왜 그렸지?’, ‘내가 왜 좋아했지?’, ‘근데 왜 난 지금은 그림 그리고 싶은 게 없지?’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 하게 되었거든요.
한참 고민하던 2010년도 즈음, <황진이>라는 드라마를 봤는데, 의상 실루엣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한복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데, <황진이>를 보고서 생각이 바뀌었죠. 일단 이걸 그려보자 결심하고 그리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한복을 그릴 때 철저히 고증을 따르는지, 아니면 현대적인 의복 요소를 적절히 가미하려고 하는지요?
제 작품 ‘눈의 여왕’은 신라 여왕의 복식을 응용해서 그렸습니다. 당시 의상을 재현하기 위해 그린 것이 아니라, 장면을 아름답게, 연극적으로 재해석하기 위한 표현에 중점을 두었어요. 현대적으로 바꾼다기 보다, 캐릭터와 이야기에 맞게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라 여왕의 금관도 눈의 여왕이 썼기 때문에, 장식이 눈 결정 모양이면 캐릭터와 맞고 전체적인 분위기에 더 어울리겠다라고 생각하는 식입니다. 
고증이 필요한 부분을 잘 살려서 지키지만, 서양동화 시리즈나 디즈니 마블 콜라보레이션은 캐릭터를 살리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이야기와 캐릭터에 어떻게 하면 잘 맞을지, 그림의 배경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이 생각하는 한복만이 가지는 미(美)란?
한복은 평면 재단이라 한복을 바닥에 펼치면 평평하게 펴집니다. 그래서 한복은 몸을 감쌌을 때, 즉 입었을 때 비로소 특별한 선들이 생겨나요. 대표적인 부분이 저고리를 입었을 때 겨드랑이 부분에 생기는 팔자주름과, 한복 치마의 주름입니다. 어떻게 치마를 걷어들이느냐에 따라, 또 어떻게 늘어뜨리느냐에 따라 선이 달라지거든요. 
한복은 ‘바람의 옷’이라고도 불리지요.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도포의 소맷자락, 춤출 때 나부끼는 한삼(여자의 윗옷 소매 끝에 흰 헝겊으로 길게 덧대는 소매) 등을 보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선의 움직임이 한복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서양 동화를 테마로 다수 작업을 진행했는데 서양 동화에 특히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어릴 때 집에 영어로 쓰인 안데르센 동화가 있었는데, 그림이 정말 예뻤어요. 동화 속 공주님 이미지가 저에게 인상깊게 남았습니다. 또 <인어 공주> 같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정말 좋아해서 비디오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봤던 기억이 있네요. 그래서 한복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다면 동화 삽화처럼 그려보는 게 어떨까 생각했어요. 
한국 전래동화에 한복이 등장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니까, 당연하지 않은 것,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했어요. ‘디즈니 애니메이션 캐릭터나 서양 동화 속 공주님들에게 한복을 입혀서 한국적인 공주로 만들어보자.’ 라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작가님은 국내외 유수의 기업들과 콜라보 작업을 많이 하셨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협업은 무엇인가요?
위스키 브랜드인 조니 워커의 인천공항 블루라벨 캐스크 에디션을 제작하는 협업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제안을 받고 처음 해보는 방식의 협업이라 두려움이 있었어요. 하지만 결과물은 예상과 다르게 반응이 매우 좋았죠. 하던 일만 해왔던 제 자신의 테두리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디즈니와 협업은 <미녀와 야수> 실사 영화의 포스터가 첫 작업이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토르: 라그나로크>입니다. 마크 러팔로 배우가 직접 저에게 이 그림을 갖고 싶다는 메시지를 제 계정에 남긴 거에요! 그래서 배우님께 디즈니 코리아를 통해서 작품을 전달했습니다. 이후로 제가 디즈니와 협업을 하면 배우분들께 항상 선물로 작품을 드리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프로젝트는 무엇인가요?
얼마 전에 한복 사진 포즈집을 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모아둔 한복 사진 자료가 굉장히 많거든요. 우리나라는 아직 한복 사진 포즈집이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저 외에도 한복을 그리는 분들이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사진 포즈집을 꾸준히 발간할 예정입니다. 
또 제가 다니고 있는 원광디지털대학교 한국복식과학학과 교수님들과 신라, 백제, 고구려, 그리고 고려 등 조선 이전의 복식을 대상으로 일러스트 작업을 해보기 위해 의견을 나누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이전 한복에 대한 책으로 <한복 이야기 남자 편>을 준비하고 있어요.
주필리핀한국문화원 전시에 작가님 신작이 소개됩니다. 신작의 주제로 필리핀 설화 ‘말라카스와 마간다의 전설’를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주필리핀한국문화원에서 소개해주신 필리핀의 설화와 전설 중 <말라카스와 마간다의 전설>이 너무 재밌더라고요. 특히 필리핀에 가면 조그만 도마뱀을 자주 보게 되고, 필리핀 사람들은 도마뱀을 잡거나 죽이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말라카스와 마간다의 전설>과 같은 건국 설화에 도마뱀이 나오더군요! 필리핀 사람들에게 도마뱀이 매우 친숙하고 상서로운 동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원래 도마뱀이 징그럽다기 보다 귀여웠어요. 도마뱀에 마음을 뺏겨 이 이야기로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필리핀 한국문화원에서 열리는 개인전의 관람 포인트를 말씀해주신다면?
한국전래동화를 소재로 한복을 입은 캐릭터들과 한국화풍으로 그린 작업은 어찌보면 당연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전래동화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구요. 하지만 서양 전래동화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이미 보편적이죠. 그래서 한복과 같은 한국 문화를 잘 모르는 분들도 부담 없이 작품들을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들이 어떤 식으로 재해석되었는지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면서, 한국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한국에 대해 관심이 있고 한복을 잘 알고 계신다면 훨씬 더 재밌게 보실 수 있고요. 작품 속 한복이 어느 한국 드라마에 나온 한복과 유사한지 맞춰보면서 보시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LIUSHEN
LIUSHEN
우나영
일러스트레이션
'한국적'인 그림을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디지털 툴을 기반으로 동양화의 선과 색감의 아름다움을 재해석하고,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진 일러스트를 그려냅니다. 한복을 입은 주인공을 내세워 동서양의 명화를 패러디하거나, 서양 동화의 한 장면을 동양의 시공간으로 전환하는 콘셉트의 일러스트는 지금의 ‘흑요석’을 있게 한 작가의 대표작입니다.
2022 개인전 <옛날 옛적에… 우나영의 한복 동화>, 주필리핀한국문화원, ㈜리우션, 필리핀
2020 개인전 <한복 동화>, 롯데호텔앤리조트갤러리, ㈜리우션, 서울
2019 단체전 <Expended Animation>, <Flip book Exhibition>, 한-덴마크 수교 60주년 기념, 디애니메이션워크샵(TAW), 비보르, 덴마크
2018 개인전 <한복입은 서양동화>,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관정갤러리, 서울
2017 단체전 <경기 전래동화>, 경기도박물관, 용인
2016 개인전 <우나영 개인전>, 바츨라프 하벨 도서관, 파리, 프랑스
2016 단체전 <스페이스 신선, 우리 옷으로 물들다>, 스페이스 신선, 서울
2015 단체전 <Alice is>, Eric Carle Museum of Picture book Art, 앰허스트, 미국
2015 단체전, <피어/오르다>, 온지음, 아름지기, 서울
2013 개인전 <앨리스, 한복을 입다>, 아트스페이스 자코,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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